말레이시아/말레이시아 생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 마젤란과 멜라카 출신 통역, 엔리케

bevinda_ 2021. 8. 1. 01:59
반응형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는 마젤란에 의해 오늘날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의 향신료 섬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한 항해였습니다. 5척의 배와 277명의 선원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스페인을 출발한지 거의 만 3년만에 한척의 배에 18명의 선원이 스페인에 돌아옵니다. 

 

목차

1. 세계 최초의 일주 항해의 배경

2. 마젤란의 항해

3. 엘카노의 항해

4. 엔리케의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 일주

5.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항해 기록

 

 


세계 최초의 일주 항해의 배경

 

마젤란은 유명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 도중 필리핀에서 사망하여 항해를 마치지 못합니다. 남은 항해는 스페인 선원인 엘카노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그렇지만 마젤란은 이전에 포르투갈 왕국에서 일할때 1511년 말레이시아의 멜라카까지 항해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마젤란이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고 간주합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있는 발견기념비(Padrão dos Descobrimentos)

 

그리고 마젤란의 본명은 마젤란이 아니었습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사람이었지만 포르투갈 국적을 버리고, 당시 경쟁국이던 스페인의 세비야(Sevilla)에 정착합니다.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세비야는 관광객에게 세비야 대성당으로 유명하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의 그래비티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스페인에서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본명 대신 스페인 이름으로 마젤란을 사용하면서 그의 이름은 마젤란이 됩니다.

 

마젤란의 항해에 참여한 277명의 선원으로 다국적이었습니다. 항해를 주관한 나라는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선원의 대부분도 스페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40명의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 29명, 프랑스인 17명, 소수의 그리스인, 아일랜드인, 영국인, 아시아 및 흑인 선원을 포함했습니다.

 

마젤란의 항해의 목적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젤란의 항해 목적은 향신료 섬(Spice Islands)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으로 지원을 받은 콜롬버스의 항해에서 발견된 새로운 섬이 포르투갈의 영토에 속하기 때문에 두 나라 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1494년 6월에 체결한 조약은 서경 46도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땅은 포르투갈에 속하고 서쪽에 있는 땅은 스페인에 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경 46도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브라질을 종단하는 선입니다. 그래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속하고 남미의 나머지 나라들은 스페인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몰루카 제도, 가운데 붉은 점 2개, 왼쪽의 붉은 점은 발리

 

그리고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동쪽으로 가는 항로는 포르투갈에 의하여 독점됩니다. 그리고 1512년에 포르투갈이 육두구, 철퇴, 정향 등의 향신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 몰로카 제도(Maluku Islands)를 발견합니다. 향신료 섬이라고 불리는 몰루카 제도는 현재 인도네시이아의 섬입니다. 

 

그래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차지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도는 동쪽 방향이 아닌 서쪽 방향으로 새로운 항로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5척의 배로 이루어진 마젤란의 함대 이름은 향신료 섬의 이름을 따서 말루코 함대(Armada del Maluco)였습니다.

 

스페인 왕 카를 1세는 마젤란의 항해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드디어 1519년 8월 10일, 마젤란은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Sevilla)에서 출발하여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섬으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기 위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마젤란의 항해의 성공 보수는 아래와 같습니다.

 

  • 10년 동안 발견된 경로의 독점
  • 토지와 섬의 총독으로 임명된 결과 순수익의 5%을 가짐
  • 항해 이익의 1/5을 가짐
  • 항해에 1,000 두캇(Ducat, 당시 통용하던 금화)을 부여 받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5%만 지불할 권리가 있음
  • 가장 부유한 6명을 제외하고 각 사람에게 섬을 부여하여 1/15을 받음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통해 향신료 섬으로 가는 경로를 찾았지만 항로가 예상보다 훨씬 길고 험난하여 상업적으로 유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젤란의 항해

 

마젤란은 1519년 8월 10일 스페인 세비야를 떠나 한달 이상을 스페인의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머물다가 9월 20일 스페인을 출발하여 9월 26일 카나리 제도에 정박합니다.

 

그리고 10월 3일,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를 출발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1520년 3월 말에 원정대는 지금의 아르헨티나에 있는 세인트 줄리안(San Julián) 항구에 겨울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남반부의 계절은 북반부와 반대입니다.

 

세인트 줄리안 항구에서 정박한 동안 1520년 4월 18일 부활절에 반란이 일어나지만 마젤란은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산타크루즈를 먼저 발견한 산티아고 호는 해변에 좌초되어 5척중 한 척의 배를 잃게 됩니다.

 

세인트 줄리안에서 거의 4개월을 보낸 후 나머지 함대는 8월 24일경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산타크루즈로 떠났습니다.

 

1520년 10월 18일에 항로 탐색에 재개하여 10월 21일, 그들은 위도 52°S에서 케이프 버진스(Cape Virgenes)라고 명명한 곶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마젤란 해협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마젤란의 스페인에서 마젤란 해협까지의 항해 경로

 

이때 함대의 두 배인 콘셉시온과 샌 안토니오가 해협 안쪽으로 탐험할때 폭풍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나와 함대에 결합 후, 다시 해협 안쪽으로 항해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해협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도슨 섬에 10월 28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젤란은 해협의 양쪽을 탐색하기 위해 함대를 두 편으로 잘라서 각각 보냅니다. 

 

마젤란이 찾은 마젤란 해협, 중간의 붉은 점은 도슨 섬

 

이때 샌 안토니오(San Antonio) 호는 도주해서 스페인으로 돌아가지만, 마젤란은 샌 안토니오를 찾느라 마젤란 해협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머지 3척의 배로 이루어진 함대는 11월 28일에 태평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젤란 함대의 배는 16세기의 유행하던 배의 형태인 카락(Carrack, 포르투갈어로 배를 의미)은 하루에 평균 128km를 갈 수 있었습니다.

 

마젤란은 스페인의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카나리 제도까지 1,298km 거리를 6일 동안 항해했습니다. 하루에 216km를 항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젤란 해협에서는 7일 동안 355km을 항해했기 때문에 하루에 50km를 항해했습니다. 

 

마젤란 해협은 570km에 가장 좁은 수로는 2km입니다. 마젤란 해협에 처음 들어왔을때는 마젤란의 카락은 평균 속도의 약 40%로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슨 섬에서 태평양에 인접한 푸에르토 데시도(Puerto Deseado)까지의 좁은 마젤란 해협의 길이는 약 300km로 10월 말부터 11월 28일까지 항해했다고 하면 하루에 약 10km를 항해해서 통상적인 배 속도의 7.8%로 항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젤란은 마젤란 해협을 모든 성도의 수로(Estrecho(Canal) de Todos los Santos)로 불렀으며, 태평양의 잔잔함에 마르 파시피코(Mar Pacifico)라고 칭했습니다.

 

반응형

 

한편 돌아간 샌 안토니오 호는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521년 5월 6일에 스페인 세비야에 돌아왔습니다. 선원들은 재판에 회부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르투갈 사람인 마젤란이 스페인 선원들을 고문했다고 주장하여 모두 무죄로 풀려납니다. 그리고 마젤란의 아내 베아트리스(Beatriz)에 대한 재정적 자원이 차단됩니다.

 

그리고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 바다를 3-4일에 횡단할거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괴혈병과 굶주림으로 고생하다가 1521년 3월 6일에 괌에 도착했습니다. 3월 9일 괌을 떠나 3월 16일 필리핀에 도착했으며 계속 남하하여 4월 6일 세부를 보고 다음날 상륙했습니다.

 

마젤란의 태평양에서 세부까지의 항해 경로

 

마젤란 일행은 세부와 인근의 섬에서 온 현지인 2,200명을 개종하지만, 막탄의 지도자 라푸라푸는 개종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마젤란은 1521년 4월 27일 아침 공격을 하고 이 막탄 전투 에서 마젤란은 독화살을 맞고 전사합니다.

 

혹은 마젤란이 모로코에서 복무중 다친 다리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라푸라푸는 마젤란의 시신을 돌려주길 거부했다고 합니다.

 

한편 재정적 지원이 끊어진 후 1521년 마젤란의 아내 베아트리스(Beatriz)도 사망합니다.

 


엘카노의 항해

 

마젤란의 사후 두 명의 공동 지휘관에 마젤란의 처남 두아르테 바르보사와 후안 세라노를 선택됩니다. 이때 마젤란의 노예인 엔리케가 해방을 요구하지만, 통역일을 하는 그를 해방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엔리케는 세부의 후마본(Humabon)을 회유하게 되고, 1521년 5월 1일에 후마본은 잔치를 가장하여, 세부인들로 하여금 27명의 선원을 죽입니다. 

 

두명의 공동 지휘관이 죽었기 때문에 주앙 카르발류(João Carvalho)가 함대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277명중 살아남은 115명으로 세 척의 배를 운행하기 어려워 5월 2일 콘셉시온(Concepción)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뒤 카르발류의 지휘 하에 몰루카 제도를 찾기 위해 6개월을 헤매며 팔라완과 부르나이로 방황하게 됩니다. 결국 9월 21일 카르발류는 선장에서 물러나면서 곤잘로(Gonzalo de Espinosa)와 주앙 세바스티앙 엘칸노(Juan Sebastián Elcano)가 각각 트리니다드(Trinidad)와 빅토리아(Victoria)의 함장으로 임명됩니다. 

 

엘카노의 항해 경로

 

트리니다드(Trinidad)는 마젤란이 지휘하던 배였습니다. 그들은 11월 8일에 드디어 목적지인 몰로카 제도의 티도르(Tidore) 섬에 도착했습니다. 티도르에서 유럽에서 최고의 향신료로 취급하는 정향을 구입했습니다.

 

12월 15일에 스페인으로 떠나려고 할때 트리니다드(Trinidad)가 물에 잠겨서 출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빅토리아(Victoria) 호만 따로 서쪽으로 스페인으로 향했습니다.

 

이에 반해 트리니다드는 몇 주에 걸친 수리 후에 태평양 경로를 통해 스페인으로 돌아 아가려고 하지만, 포르투갈에 의해 잡히고 트리니다드 호는 난파됩니다.

 

 

빅토리아 호는 1522년 5월 6일에 희망봉을 지납니다. 그리고 1522년 7월 9일 Elcano가 식량 공급을 위해 포르투갈 카보 베르데 군도 입성했을 때 20명의 선원이 굶주림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7월 9일이 아니라 10일이었습니다.

 

마젤란 일행은 동쪽에서 서쪽 한 바뀌를 돌아서 하루를 잃어버렸습니다. 경도 1도를 지날때마다 4분씩 추가되었습니다.  1873년에 발표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 하루를 더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카보 베르데 군도, 포르투갈에서 독립해서 카보베르데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날짜변경선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시간대 시스템은 1876년 샌포드 플레밍(Sandford Fleming) 경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그는 캐나다 철도 시스템 설계를 위해 철도를 효율적으로 운행하기 위해 시간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엘카노와 17명의 선원은 거의 3년이 지난 1522년 9월 6일, 스페인의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로 돌아옵니다. 살아온 18명의 증언도 마젤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엘카노는 마젤란이 가졌던 산티아고 기사단, 해군 대령, 무기 소지 허가를 요구했지만, 거부되었습니다.

 

대신 엘카노는 그의 업적으로 연간 500 두캇(Ducat)을 지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후에 카보 베르데에 포로로 잡혀 있던 13명의 남성(유럽인 12명과 몰루칸 1명)이 세비야로 돌아와 일주도 완료했습니다.

 

몰루카에서 포르투갈인에게 붙잡혀 있던 트리니다드 의 생존자들은 포르투갈의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결국 7개월 간의 협상 끝에 석방되었습니다. 이중에서 5명만 살아남았습니다.

 

1525년 엘카노는 나중에 스페인 왕 카를 5세가 몰루카 제도로 7척의 함대를 이끌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항해 도중에 괴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스페인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을 최초로 세계 항해를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1525년 스페인의 왕 카를 5세는 로아이사 원정대를 보내 몰루카 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습니다. 스페인은 티도어 섬에서 포르투갈인들은 테르나테 섬에서 몰루카 제도의 영토를 놓고 거의 10년 동안 접전을 벌였습니다.

 

1529년 스페인 과 포르투갈 간의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Zaragoza)으로 몰루카는 포르투갈에, 필리핀은 스페인에 할당했습니다. 

 


엔리케의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 일주

 

선원 중 아시아인 엔리케는 마젤란의 노예이며 동시에 통역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엔리케 대신 가상 역사 소설에 나온 가상의 말레이 이름인 아왕(Awang)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마젤란이 죽고 노예 해방을 요구했지만, 새로운 지휘관에 의해서 그 요청은 거절됩니다. 그래서 엔리케는 필리핀 세부의 후마본을 통해 잔치를 가장한 함정으로 선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유를 쟁취합니다. 

 

멜라카의 엔리케의 집으로 돌아가는 가상 여행 경로

 

마젤란의 유언장에는 그를 (말레이시아) 멜라카의 토박이라고 부르지만, 항해 기록을 남기는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그가 수마트라 출신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세부에서 멜라카까지의 직선 거리는 2554km 정도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세부에서 멜라카로 돌아갔다면 세계 일주를 한 첫 번째 사람이겠지만, 불행히도 이후 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항해 기록

 

마젤란의 항해에 참여한 선원의 마젤란에 대한 악평에도 우리가 여전히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알고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탐험가이자 최초로 살아남은 18인 중의 하나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항해 기록때문입니다.

 

일단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포르투갈, 스페인 사람이 아닙니다. 마젤란의 항해에 참여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 도착한 후 그의 고국인 베네치아 공화국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세계 일주 첫 번째 항해에 관한 보고서(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에서 자신의 항해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은 태평양이란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책입니다.  

 

학자들은 피가페타의 항해 일기를 마젤란의 항해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설명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엘칸노와 살아남은 선원에 의해 퍼진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FIN

 

반응형